나에겐 한살 터울의 언니가 한명 있다.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해서 똑똑하다는 소릴 많이 듣고 자랐었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셔서 그런지 유난히 가족들에게 엄하셨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장녀의 역할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인지
우리 언니는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랐다.
어린시절 세발자전거를 타더라도 나를 앞에 태우고 뒷자리엔 내여동생을 태워
본인은 자전거를 줄에 메달아 끌어줬던 언니였다. 동네 남자애들과 눈싸움을 할 때
행여라도 동생들이 눈뭉치에 맞을까봐 자기 뒤에 서 있으라고도 했다.
고작 나보다 한살 밖에 안 많으면서...
우스갯 소리도 잘하고 재치가 있어 이영자 보다 더 뛰어나 개그우먼이 되거나,
노래도 어찌나 잘하는지 주현미보다 유명한 가수가 될 줄 알았다.
타고난 허스키한 목소리로 구성진 트롯트를 부르면 가슴한켠이 뭉클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그런 노래를 불렀었다.
아니면, 다섯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한글을 깨우쳤던 그 영특한 머리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커리어우먼이 되거나...
그런 다재다능한 언니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장녀 노릇한다고 벽돌 공장에서 경리로 일을 했었고,
월급을 받으면 꼬박꼬박 아버지한테 갖다 바쳐며 빛이 보이지 않은 살림살이에 보탰다.
그 후에도 애처로운 손으로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멀리 서울까지 가서도 열심히 생활비를 보내왔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언니가 엄청난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중2가 질풍노도의 시절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언니는 늦은 나이에 사춘기가 와서인지 부모님이 하라는 일은 모조리 하지 않았다.
스무살이 되자마자 연락두절은 물론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
가수가 되겠다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사기 당해서 생긴 빚은 엄마가 아버지 몰래 갚아주기도 했었다.
가끔 엄마가 그 얘길 하시는 걸 들어보면 그 돈이 그때 당시 아파트 두채를 살수 있었던 돈이었다고 한다.
착실하고 가족들 밖에 모르던 언니를 봐 오셨던 엄마는 앓아누우셨고 아버지는 자식하나 없는셈 치겠다고
매몰찬 말을 서슴치 않게 내뱉었다.
그런 언니의 역할이 오로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게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늘 옆에 있어주던 언니가 없어져서 외로와서인지 언니를 정말 많이 미워했다.
그러던 언니가 나의 결혼과 함께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결혼을 해 첫아이를 낳자 몸조리를 해줬고, 둘째를 낳았을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행여 남편이랑 싸웠을 때는 " 못살겠으면 이혼해! 애들은 내가 키워줄테니까"라며
투박한 말투이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말로 무조건적인 내편이 되어줬다.
지금은 홀로 되신 엄마의 일이라면 최우선적으로 발벗고 나서고, 동생들과 조카들이 행여라도
아프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애쓴다.
언니는 한번씩 술을 마실 때는 옛일을 떠올리며 지난날을 후회하며 눈물을 짓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라며....
난 언니가 이제 그런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언니는 과거의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존재하니까...
언니를 생각하면 짠한 느낌에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과연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았던 적이 있을까?
오히려 반항했던 20대 시절이 언니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언니야!! 니 인생 살아!!
바보같이 동생들 걱정 그만하고
행복하게...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내언니여서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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